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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과 메시아주의의 차이는 우선 시간의 차이로 이해하는 것이 낫겠다. 아감벤에 따르면 묵시록이 '시간의 종말' 그리고 그와 이어지는 어떤 비세속적인 무의 시간을 상상한다면, 메시아주의는 이른바 '종말의 시간' 또는 '시간과 종말 사이에 남아 있는 시간'을 사유한다. 그것은 여전히 세속적인 시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속적인 것과 구분이 안 되는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메시아주의 서사나 담론은 묵시록적인 파국의 환상을 특별히 동반할 필요가 없다. 묵시록적 파국의 환상 속에서 시간은 보통 그것의 종말이 앞당겨지기를 원하는 욕망으로 지탱되며, 이러한 욕망의 기대 지평에 알맞은 환상을 창출한다. 시간의 종말을 앞당기는 플롯으로 짜인 묵시록. 그럼에도 이 구분이 여전히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면, 묵시록의 대중문화 버전인 좀비 아포칼립스에 구현된 시간을 한번 상상해보면 좋겠다. 예를 들면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28일 후>(28 days later, 2002)나 미국 TV 시리즈물인 <워킹 데드>에서 인간 대부분이 파멸하거나 좀비로 변한 뒤에 찾아오는 불편한 고요함이나 인간이 사라진 자연의 이미저리가 주는 무상함 등을.이에 비해 메시아주의의 시간은 시간을 절단하는 시간 또는 시간에 개입(절단)하는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 그 대표적 사례로 나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근미래 영화인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2006)에 나오는 기적과도 같은 어떤 순간을 언급하고 싶다. 이 영화는 더 이상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불임의 미래를 다루는데, 오늘날의 현실('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정부군과 반정부 급진 테러리스트 사이의 극한 대립, 철창신세의 난민들로 가득 찬 슬럼가와 온갖 미술품으로 치장된 펜트하우스의 상류사회)을 몽타주한 실감이 특히 뛰어나다.내가 말하는 기적의 순간은 <칠드런 오브 맨>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난민들이 사는 낡은 건물에 고립된 테러리스트들과 정부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에 불임의 현실에서 기적적으로 태어난 갓난아이를 제3국에 데려다주는 임무를 떠안은 주인공 테오는 보자기에 아이를 감싸 데리고 나온다.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 데다가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것은 절망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한마디로 그에겐 시간이 없다. 그런데 총포 소리가 어지러이 교차하는 가운데 희미하게 들리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차 총과 대포의 엄청난 파열음을 잠식해가는 장면이 시작된다. 아이를 강보에 감싸 안은 테오와 계단에서 마주친 테러리스트들 그리고 그들을 쫒는 영국군들이 차례로 갓난아이를 보자마자 총을 내리면서 경이로운 표정으로 아이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마침내 모든 이들이 일제히 총을 겨누거나 쏘기를 멈추는 짧은 휴지부가 영화에서 기적적으로 열린다. 흥미로운 것은 이 디제시스의 순간이다. 일련의 시퀀스에 특별히 환상적인 색감이 더해진 것은 아니다. 분명 초월적인 어떤 순간이 출현했지만, 그에 따라붙을 어떠한 매혹적인 이미지도 영화의 디제시스의 장에 덧붙여지지 않는다. 여기서 메시아적 시간을 이렇게 상상해보자. 영국군 또는 테러리스트들이 전투를 벌이는 장면은 다르게는 시간의 주도권을 둔 싸움일 것이다. 누가 오래 버틸 것이며, 누가 승산을 쥘 것인가. 이게 비해 자신을 지킬 변변한 무기 하나 없는 주인공에게 시간은 결코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앞서 묘사한 이 마술적인 순간을 통해 잠시나마 시간은 구부러져 전적으로 주인공 편으로 스며든다. 아기와 주인공은 무사히 탈출하고, 이 마술적 순간을 끝으로 다시 전투의 시간은 이어진다. 크로노스에 침투해 그것을 절단하는 이 시간을 메시아적인 순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방금 <칠드런 오브 맨>을 예로 들었지만, 묵시록 텍스트와 메면, 미래에 희망이 없다는 일종의 우울증 같은 것을, 생각 있는 사람들조차 암암리에 광범위하게 앓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선거니 대통합이니 하고 조급하게 말하는 것일 테다.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는 말이 선거의 심판론으로 환원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역설적으로 절망을 느꼈다. 자크 라캉이 어디선가 말했던 것처럼, 우울은 영혼의 한 상태라기보다는 도덕적인 질병이다. 지금 우리는 집단적 조증을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묵시록의 네 기사>, 복도훈[출처] 짧고 긴 글 모음|작성자 Pete
